글/ 허호정(미술비평)
“아주 잠시/ 시 속에서/ 집을 짓는 것 같았어요 (…)
입구를 막고/ 초를 켰죠 거기 있었어요/ 그 길고 추운 저녁들 내내”
울라브 하우게, 〈나뭇잎집과 눈집〉 부분
임선기 역,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봄날의 책(서울), 2017, 39-41쪽.
강지윤 개인전 《얼음의 언저리를 걷는 연습》은 유약함과 단단함 사이의 관계에 놓인 한 가지 양상을 보여준다. 유약한 것과 단단한 것은 서로 상반되는 성질을 가리키지만, 한 쪽에서 다른 한 쪽으로의 전화(轉化)가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대립되는 개념만은 아니다.
가령, 나뭇잎과 눈으로 지어진 집 아래에서 초를 켜고 시를 읊조리는 장면을 그려본다. 차갑게 맑은 계절이 채 시작되기 전에, 유약한 지붕 아래 그것을 ‘집’이라 부르며 부스러지기 쉬운 감정들을 눈을 뭉치듯 다져가는 상태를 그려본다. 이것이 자아내는 심상은 단단하다. 가장 유약한 것들의 아래에 앉아있을지라도 온도는 따뜻하며, 그 자리에 처한 마음은 안정적이고 유순하다.
이처럼 한 시인이 유약한 것들을 모아 단단한 이미지를 그리는 동안, 강지윤이 담는 이미지의 양상은 그 반대를 향한다. 그것은 다소 안쓰럽게도 어떤 단단함이 유약하게 부서져버리는 일종의 역상을 그린다.
전시장의 입구에 들어서면 깨진 유리조각들이 발 앞에 놓인다(〈덩어리와 얼룩과 아무것도 아닌 것〉). 곱게 원형으로 배치한 파편들은 보는 이에게 특수한 형상을 떠올리도록 유도하는 듯 했으나, 도리어 그러한 모양 짓기가 파편을 파편으로 남게 하여 구체적인 대상을 그리기는 어렵게 된다. 이처럼 조각들을 한데 모아 이름 붙일 수 없는 모양으로 만드는 시도는 전시를 구성하는 다른 작업에서도 발견된다. 그 시도는 유리조각들이 ‘어떤 무엇으로부터 깨어져 나온 것’임을 환기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형상을 이룩하는 데에는 실패한다.
〈공백의 모양 II〉는 작가의 지문이 남은 잘 빚은 파라핀 조각들이 켜켜이 수직으로 쌓인 것으로, 그것이 과연 ‘공백’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역시 어떤 모양을 시도하고 있다. 이는 곧바로 〈공백의 모양 I〉로 이어지면서 같은 소재의 반투명한 조각들이 판 위에 올려 져 또 다른 형상을 만든다. 이때의 형상은 전자에 비해서는 구체적이다. 그것은 상식적인 수준에서 떠올릴 수 있는 어떤 생명체 – 개나 고양이 – 의 골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도 엉성한 모양 만들기의 일환일 뿐 해부학적 정확성을 기한 것도 아니어서 이것이 ‘무엇이구나.’ 하는 답에 닿지는 못한다. 오히려 이 엉성한 형상은 원 형상으로부터 유추된 파편 정도로 이해될 따름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강지윤이 그러모으는 이미지는 유약한 것으로부터 단단한 무엇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단단한 것으로부터 조각나고 흘러나와 유약한 것들에 이른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그가 사운드 및 영상 작업에서 잇따라 보여준 어법과도 상통한다. 〈간극의 거리〉에서 ‘살려주세요.’를 연기하는 배우에게는 목소리가 없고, 아주 간절한 입모양만 남는다. 터널의 끝에서 (이 터널의 생김새를 가진 조형물은 망원경 같기도 하고, 나무 위에 지어진 오두막 같기도 하다.) 자신을 살려 달라 외치는 사람이 등장하는 이 영상은 소리를 소거한 채 아우성을 몸짓으로만 수행한다. 영상은 으레 있어야 할 사운드에 대한 기대(또는 ‘살려주세요.’라는 의미의 절박함이 더 큰 소음을 유발해야 마땅할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리며, 묘연한 구명이나 구원도 사실상 마다한다. 대신 관객은 영상 속 인물이 처한 상황, 어디로부터 부서져 나와 간절한 입모양을 가지게 된 것인지를 궁금히 여기게 될 것이다. 또, 이 입모양은 단 하나의 분절된 어구를 반복하면서 다른 상상적 가능성을 마련하지도 않는다.
전시의 중심을 맡고 있는 〈한 숨과 긴 숨〉은 앞서 묘사한 다른 작업들과 마찬가지로, 일견 유약한 시청각적 요소가 모여서 단단한 모양/사운드를 만들어 나가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역시 마찬가지로 이 작업에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손에 잡히고 귀에 걸리는 구체적인 무엇을 얻을 수 없다. 작가는 ‘숨’에 근접하는 모양/사운드를 위해 퍼포머들에게 각자가 ‘숨’을 이해하는 방식으로 소리를 내도록 주문했다. 퍼포머들은 자기 나름의 숨소리를 가지고 영상을 메우고 있으며 (그러나 결코 ‘숨’에 다다르지 않고 흩어지는 소리로 존재하며), 이 위로 펼쳐지는 자막 내레이션은 숨과 숨이 쌓인 결과물에 서사를 부여하는 듯하다. 그러나 ‘확신’과 같은 단어가 오가는 자막의 틈에, 아래로 흩날리는 커튼 깃이나 방울져 떨어지는 물, 서서히 깨져서 조각이 되는 얼음 덩어리가 등장하는 장면은 어떤 구체적인 서사 또는 대상을 맺지 않는다.
강지윤은 유약한 것들을 단단한 것으로 만들어 보려는 의지를 곳곳에 선보임에도, 반복해 말하지만 무엇으로부터 부서져 나온 유약한 상태 자체를 목도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파편, 잔해, 유약한 것들에 대한 이미지/사운드는 다소 불안한 정동을 불러일으킨다. 이때, 〈한 숨과 긴 숨〉은 “단단한 머리를 상냥하게 쓰다듬는” 꿈을 꾸며 일어나는 내레이션 자막으로 마무리되는데, 씬 전환이 있기 직전에 등장하는 손은 살짝 둥글게 말린 아래로 텅 빈 공간을 마련하고 사실상 부재하는 무엇을 어루만지는 동작을 보여준다. 여기서 엿보이는 기대는 강지윤의 조형 언어가 지금의 양태와는 또 다르게 나아갈 가능성을 미미하게나마 생각하게 한다. 작가는 유약한 것의 파편적 심상에 들러붙는 대신, 유약한 것의 단단한 존재를 인정하게 된 일인지도 모른다. 불안의 향방을 조정할 수 있을까? 단단한 쪽으로 몸을 틀어보는 일이 가능할까? 섣부른 대답 대신, 조용히 그가 유약한 것의 아래에 웅크리고 앉아 모양들을 더듬는 광경을 바라보고 싶다.